
How to do things with videogames (1)
게임 디자인이나 시나리오에 관한 책은 찾아보기 쉽지만 '비디오 게임의 문화적, 예술적 특징과 그 중요성' 이라는 주제를 기준으로 책을 찾아봤을 때 찾아볼 수 있는 한국어 책은 거의 없다. 번역본도 전무하고, 애초에 그와 같은 주제로 서적이 출판된 경우를 찾아보기가 어렵다. 약 10년 전까지도 게임의 강제적 셧다운제가 존재했으며 진지하게 정치, 언론에서 게임의 유해함이 논의 되었던 것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2010년도 중반까지도 정치권과 언론은 게임 중독과 폭력성 문제를 집중적으로 강조하며 게임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고착화 했고, 그러한 한국의 분위기에서 비디오 게임의 문화적, 예술적 가치를 조명하는 연구나 서적이 나오기 어려웠던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이다.
반면, 해외에서는 이미 2000년도 초반부터 게임의 예술적 가치를 인정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2006년 프랑스 문화부 장관은 비디오 게임을 '문화적 생산물'이자 '예술적인 표현의 형식'으로 공식화했고, 2003년, 티파니 홈즈Tiffany Holmes는 멜버른에서 열린 디지털 아트와 문화에서 <고전 아케이드 게임은 예술을 포괄하는가? 아트 게임 장르의 최근 동향 <Arcade Classics Span Art? Current Trends in the Art Game Genre>를 발표했고, 2007년, 로드 험블은 초기 아트 게임 중 하나로 대표되는 The Marriage를 퍼블리싱했다.
그러다보니 상대적으로 해당 주제에 관한 자료를 찾아볼 때는 훨씬 풍부한 해외의 자료들에 눈을 돌릴 수 밖에 없었다. 나와 같이 해당 분야에 갈증이 있는 사람에게는 당연한 일이었다. 이런 배경을 바탕으로, 내가 인상 깊게 읽었던 책들 중 몇 권의 일부를 조금씩 번역해 올리고자 한다. 비록 책의 전체 부분은 아니지만 같은 분야에 관심을 가진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길 바란다.
여기에서는 학자이자 게임 디자이너, 워싱턴대 예술과학부의 교수인 이안 보고스트Ian Bogost가 2011년에 출판한 'How to do things with videogames'의 'art' 챕터 앞부분을 소개한다. 해당 챕터의 서문에 해당하는 부분으로, 챕터의 핵심 주장이 담긴 부분은 이어서 번역 & 업로드 해나갈 예정이다.
비디오 게임은 과연 예술일까? 이 질문은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켰는데, 영화 평론가인 로저 에버트Roger Ebert가 “매체의 특성상 그것이 단순한 기능에서 예술의 수준이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라고 선언한 것이 시발점이 되었다. 그러나 철학자이자 게임 디자이너인 짐 프레스톤Jim Preston에게 그것은 아주 부조리하고 쓸모 없는 질문이었다.
“단 하나의 예술, 모두가 동의하고 인정하는 단 하나의 예술이 있다는 생각 자체가 예술을 후퇴시키는 것이다. 미국인의 예술에 대한 태도는 본질적으로 분열되어 있고, 뒤틀려있으며, 혼란스럽다; 그리고 게이머들에게 전하는 나의 조언은 그저 단순히 ‘이게 예술이라고?’ 라는 논쟁을 모두 무시하라는 것이다.”
프레스톤은 '예술로서의 게임’ 논쟁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를 조명했다. 게임에 대해 논의하기 이전에, 먼저 ‘예술’이라는 것이 이미 하나의 안정적인 의미를 현대 문화에서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런 예술에 대한 개념의 변화에는 매우 다양한 원인이 존재한다. 예상하건데 가장 큰 요인은 20 세기의 아방가르드가 예술에 대한 개념을 완전히 전복시켰다는 데에 있을 것이다. 소용돌이같았던 지난 세기의 첫 20년 동안, 유럽 지역의 운동들은 전통주의를 거부하며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미래주의의 창시자 필리포 마리네티Filippo Marinetti는 모든 낡은 것들을 거부했고 새로운 것, 기계, 그리고 폭력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세계 1차 대전에서 그 폭력이 실체화 되었을 때, 취리히의 많은 아티스트들은 만약 진보에 대한 계몽이 세계 대전이 불러온 파괴를 가져온 것이라면 진보는 거부되어야 한다고 단호히 결론지었다. 그들은 그들의 운동을 다다Dada라고 불렀다. 미래주의자들은 정치적 삶과 문화적 삶에 있어서 완전한 개혁을 주장했다.
다다는 예술적, 사회적 관습을 경멸했으며, 부조리함과 재맥락화를 옹호했다. 트리스탄 짜라는 모자에서 랜덤으로 단어를 꺼내 실시간으로 만든 시를 공연했고, 마르셀 뒤샹은 변기를 화장실이 아닌 박물관에 놓아둠으로써 예술품으로 만들었다.
종합적으로 ‘아방가르드’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이러한 운동들은 전통적인 예술의 역할과 그 맥락을 파괴했다. 지난 세기가 지나면서 점점 더 예술을 형태나 기능만으로는 구별할 수 없게 되었고, 그 맥락이 좀 더 중요한 요인이 되었으며 그것의 자의성은 뒤샹의 변기에 의해 영원히 드러나게 되었다. 그러나 이미 아방가르드 운동 전에도, 예술의 역사는 예술을 재발견하고 개혁하기 위한 크고 작은 운동들로 가득차있다. 그것이 급진적으로 이루어지진 않았더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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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역사의 관점에서 볼때, ‘예술’이라는 개념이 획일적이고 분명하다는 주장은 프레스톤이 앞서 주장했듯 터무니 없다. 그렇다면 예술의 역사에 대한 기초적인 이해를 통해 비디오 게임이 무언가를 배울 수 있을까? 먼저, 통일된 이론이라는 것이 예술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어느 매체에서든 순수하고 단일적인 해석을 추구하는 것은 쓸모 없는 일이다. 그보다, 예술의 역사는 붕괴와 재발견의 연속이었으며, 역사적인 시기에 따른 아이디어와 유행의 충돌이었다. 19세기 부터는 더더욱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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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은 인간의 역사 속에서 많은 것들을 해왔지만, 특히 지난 세기에서는 우리의 생각을 자극하고, 불편하게 만들었다. 우리를 다른 방식으로 보게하기 위해서 말이다. 예술은 변한다. 우리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예술의 아주 본질적인 목적은 그 자체가 변화하는 것이며, 그것도 우리를 데리고 변화하는 것이라고. 그렇다면 예술 속에서의 게임의 역할은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게임이 단순히 영화나 소설이 가진 작가적 지위에 도달해야한다는 에버트의 만족스럽고 도전적인 시각은 가야하는 방향이 아니다. 비디오게임의 법적 발언으로서의 지위에 대한 주장을 하는 비디오 게임 옹호자들 사이의 열정적인 어리석음도 답은 아니다. 또한, 친숙한 게임 이미지를 민속 예술 오마주로 재활용하여 Etsy.com에서 판매하는 공예품이나 비디오 게임 블로그에 소개하는 것도 그 방향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주요 비디오 게임 소매업체의 무역 박람회인 EEE(Electronic Entertainment Expo)에서 수년간 전시회에 게임 스틸과 콘셉트 아트를 걸어 갤러리 지위를 부여하는 것도 아니다.
이러한 불확실성에도 불구하고, ‘예술로서의 게임’ 이라는 개념, 혹은 제이슨 로러Jason Rohrer에 따르면 예술게임art-games 이라는 용어는 그 자체로 어떤 통찰을 준다. 그것은 게임이 미술fine-art 세계에 충성을 맹세하는 대신 수행의 공동체, 심지어 게임 산업 내에서 ‘자연스럽게’ 예술로서 해석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그것을 만드는 사람의 역할은 첫째로 게임 개발자이며, 아티스트의 역할은 두번째이다. 그것도 가능하다면 말이다. 대조적으로, 게임 아트라는 용어는 박물관이나 미술관과 같은 “전통적인” 공간에서 (뒤샹의 작업에도 불구하고) 전시되는 작업들을 묘사한다. 코리 아칸젤Cory Arcangel의 작품 중 하나인 “Super Mario Clouds”는 닌텐도 게임을 해킹하여 떠다니는 구름을 제외한 모든 것을 없애버리는데, 이 작품은 게임 아트라는 개념에 대한 좋은 예시를 보여준다. 이 게임들은 전시되면서도 플레이되지는 않는다.
이와 같은 구별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비유의 힘에도 불구하고, 아트게임은 플레이어들, 창작자들 혹은 비평가들에게 사용되기에는 효과적이지 않은 용어이다. 그것은 미래주의나 사실주의와 같이 아직 정의되지 않은 운동이나 스타일에 대한 대체어이다. 그보다 우리는 예술과 게임에 관련한 게임의 위치를 정의하기 위한 바램으로써, 게임 개발 그 자체의 특정한 미학적 유행을 좀 더 깊게 들여다 봐야 한다. 다르게 얘기하면, 우리에게 부재한 것은 게임이 이론적 역사적으로 더 넓은 예술 개념의 범주에 참여하는 개발 협약, 스타일, 운동에 관한 논의이다. 우리가 고려할 수 있는 많은 스타일들이 있으니, 먼저 집중할 하나를 골라보자.